회의가 많은 직업이 된 이유, 엔지니어링에서 회의가 사라지지 않는 구조

회의중인 엔지니어들의 모습을 나타낸 이미지



엔지니어는 왜 이렇게 회의가 많을까. 플랜트 엔지니어링 현장에서 회의는 종종 비효율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구조적으로 피하기 어려운 과정이다. 이 글은 설계·시공·운영이 동시에 맞물리는 플랜트 프로젝트에서 왜 회의가 필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어떤 회의가 문제를 줄이고 어떤 회의가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지를 실제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엔지니어링에서 회의는 잡담이 아니라 판단을 공유하고 리스크를 제거하기 위한 장치이며, 그 질이 프로젝트의 안정성을 좌우한다.

회의가 많다는 말은 절반만 맞다

엔지니어 직무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불만 중 하나는 “회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회의에 들어가 있다 보면, 정작 설계할 시간이 없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래서 회의는 흔히 비생산적인 활동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플랜트 엔지니어링에서 회의는 단순한 보고 자리가 아니다. 회의가 많아진 이유를 구조적으로 보면, 엔지니어링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더 많은 이해관계가 동시에 얽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회의의 양이 아니라, 회의가 어떤 역할을 하느냐다.

엔지니어링은 혼자 결정할 수 없는 구조다

플랜트 프로젝트에서 하나의 판단은 여러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배관 루트 하나를 바꾸면 구조물, 전기, 계장, 시공 순서까지 함께 바뀐다. 이 판단을 개인이 단독으로 내리면, 다른 영역에서 반드시 충돌이 발생한다.

그래서 엔지니어링에서는 판단을 공유하는 과정이 필수다. 이 공유가 바로 회의의 역할이다. 회의는 결정을 미루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결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설계 초기 단계에서 회의가 많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시점에서 판단을 충분히 맞추지 않으면, 시공 단계에서 훨씬 더 큰 수정과 재작업이 발생한다.

회의가 줄어들수록 현장은 더 바빠진다

아이러니하게도, 회의를 줄이겠다고 선언한 프로젝트일수록 현장은 더 혼란스러워지는 경우가 많다. 설계 의도와 변경 사항이 충분히 공유되지 않아, 각자가 다른 기준으로 작업을 진행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설계 변경이 메일 한 통으로만 전달되었을 때, 어떤 공종은 이를 반영하고 어떤 공종은 놓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 작은 불일치는 현장에서 간섭과 재작업으로 이어진다.

이때 뒤늦게 열리는 회의는 이미 문제를 수습하는 자리다. 즉, 회의가 없어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회의가 필요해지는 구조다.

좋은 회의는 문제를 사라지게 만든다

플랜트 엔지니어링에서 좋은 회의는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만든다. 설계 리뷰 회의에서 “이 부분은 현장에서 위험할 수 있다”는 한마디로 구조가 바뀌고, 그 결과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회의는 길지 않다. 핵심 판단과 리스크만 공유되고, 결론이 명확하다. 참석자들은 자신의 역할과 다음 액션을 분명히 알고 회의를 나간다.

반대로 나쁜 회의는 결론이 없다. 정보만 나열되고, 판단은 미뤄진다. 이런 회의가 반복되면 회의 피로도가 쌓이고, 결국 중요한 회의에서도 집중력이 떨어진다.

회의가 많아지는 진짜 이유

엔지니어링에서 회의가 많아지는 진짜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설계가 완전히 확정되지 않았고, 현장 조건도 계속 변하며, 발주처 요구도 수시로 바뀐다. 이 불확실성을 관리하기 위해 판단을 자주 맞춰야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책임 구조다. 중요한 결정은 기록으로 남겨야 하고, 여러 이해관계자의 합의가 필요하다. 회의는 이 합의를 공식화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회의는 줄이기보다, 시점을 앞당기고 질을 높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문제를 초기에 공유할수록, 회의는 짧아지고 현장은 조용해진다.

엔지니어에게 회의는 또 하나의 설계다

경험 많은 엔지니어는 회의를 설계한다. 어떤 안건을 언제 올릴지, 누구를 불러야 할지, 어디까지 결정할지를 미리 생각한다. 이 준비가 부족하면 회의는 시간 낭비가 된다.

잘 준비된 회의는 설계 도면 한 장만큼의 가치를 가진다. 판단이 공유되고, 리스크가 제거되며, 협업의 방향이 맞춰진다.

회의가 많다는 것은 복잡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다

회의가 많다는 사실은 엔지니어링이 비효율적이라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하고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신호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회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회의를 통해 문제를 앞에서 제거하는 것이다. 좋은 회의는 시간을 빼앗지 않고, 시간을 되돌려준다.

엔지니어링에서 회의는 설계의 연장선이다. 선 대신 말로 구조를 맞추는 과정이다. 그래서 엔지니어는 오늘도 회의에 들어간다.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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