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뉴얼로 설명되지 않는 엔지니어링, 기준서 바깥에서 내려지는 판단
| 도면을 살펴보는 엔지니어와 관계자들의 모습을 나타낸 이미지 |
기준서는 충분하지만, 항상 완전하지는 않다
플랜트 엔지니어링에는 수많은 기준서와 매뉴얼이 존재한다. 배관, 구조, 전기, 계장 등 각 공종마다 적용해야 할 규정과 절차가 정리돼 있다. 신입 엔지니어에게 이 기준서들은 가장 든든한 기준점이다.
하지만 실무를 하다 보면, 기준서를 모두 만족했음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은 순간을 맞닥뜨리게 된다. 계산은 맞고, 규정도 어긋나지 않는데, “이대로 가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이 남는다.
이 질문이 생기는 지점이 바로 매뉴얼로 설명되지 않는 엔지니어링의 영역이다.
기준을 만족해도 불안이 남는 이유
플랜트 설계에서 기준은 최소 요구 조건을 정의한다. 다시 말해 “이 선을 넘으면 안 된다”는 경계선에 가깝다. 하지만 현장은 기준선 위에서만 움직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배관 간격이 기준을 정확히 만족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도면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시공 오차, 작업자의 숙련도, 설치 순서에 따라 상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 변수들은 기준서에 모두 나와 있지 않다. 그래서 경험 많은 엔지니어는 기준을 만족했는지보다, 기준 근처에서 얼마나 여유가 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매뉴얼에 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시공 단계에서는 매뉴얼에 없는 상황이 더 자주 발생한다. 현장 조건이 설계 단계에서 예상과 다르게 드러나거나, 기존 설비와의 충돌이 뒤늦게 발견되는 경우다.
이때 기준서는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 경우 어떻게 하라”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는 선택지를 직접 만들고, 그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
예를 들어 배관 간섭이 발견됐을 때, 기준서에는 간섭을 피하라는 원칙만 있을 뿐, 어떤 방향으로 얼마나 수정해야 하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이 판단은 전적으로 엔지니어의 몫이다.
경험이 매뉴얼을 대신하는 순간
매뉴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경험이다. 과거에 비슷한 상황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어떤 선택이 결과적으로 더 나았는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경력이 쌓일수록 엔지니어는 매뉴얼을 덜 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매뉴얼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내용을 몸으로 체화했기 때문이다.
경험 많은 엔지니어의 “이건 좀 위험해 보인다”라는 말은, 기준서 한 페이지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매뉴얼을 넘어서는 판단이 위험해 보일 때
매뉴얼을 넘어서는 판단은 종종 위험해 보인다. 기준을 벗어난 선택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직에서는 이런 판단을 꺼리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많은 사고는 매뉴얼을 지키지 않아서가 아니라, 매뉴얼만 지키고 그 바깥을 보지 않아서 발생한다. 기준을 만족했다는 이유로 위험 신호를 무시한 결과다.
엔지니어링에서 중요한 것은 매뉴얼을 따를지 말지가 아니라, 매뉴얼이 다루지 못하는 영역을 어떻게 보완할지다.
매뉴얼은 책임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간혹 “기준대로 했습니다”라는 말이 책임을 면해줄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기준이 충분했는지는 다시 검토 대상이 된다.
엔지니어는 기준을 지켰다는 사실보다, 위험을 인지하고도 적절한 판단을 했는지가 더 중요하게 평가된다. 매뉴얼은 판단의 출발점이지, 면책 조항이 아니다.
좋은 엔지니어는 매뉴얼을 ‘사용’한다
경험 많은 엔지니어는 매뉴얼을 절대적으로 따르지도, 완전히 무시하지도 않는다. 매뉴얼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한다.
어디까지는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디부터는 상황에 맞게 보완해야 하는지를 구분한다. 이 균형 감각은 매뉴얼만 읽어서는 생기지 않는다.
엔지니어링은 기준 너머를 보는 일이다
플랜트 엔지니어링에서 매뉴얼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실제 현장은 항상 기준서보다 복잡하고, 변수는 언제나 예상을 벗어난다.
그래서 엔지니어는 매뉴얼을 따르면서도, 그 바깥을 본다. 기준을 지키되, 기준이 놓친 위험을 상상한다.
매뉴얼로 설명되지 않는 영역에서 내려지는 판단, 바로 그 지점에서 엔지니어의 가치가 드러난다. 엔지니어링은 규정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규정 너머의 현실을 책임지는 일이다.